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유대인 탄압 === || [[파일:external/m.hi-likes.com/7369.jpg|width=300px]] || ||일명 "증오의 눈빛"(Eye of hatred)라고 불리는 사진.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15차 총회에서 찍힌 사진이다.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사진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사진사를 노려보는 모습을 절묘하게 찍은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높은 확률로 "[[http://1.bp.blogspot.com/-utGcaP2xl7M/U5ZhcvlxfRI/AAAAAAAAJRo/WoUe4aJfzhs/s1600/Eyes+of+Hate,+A+candid+photograph+of+Goebbels+after+he+finds+out+his+photographer+is+Jewish.jpg|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과 같이 쌍으로 묶인다. 이 사진도 "증오의 눈빛"과 같이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서 찍힌 사진이다. 단 두 사진 중 어느 사진이 먼저 찍힌 사진인지는 불명.] 그에 대한 근거는 없으며 괴벨스의 악명과 엮여 퍼진 거짓말로 추측된다.[* 굳이 따지자면 회의 중 갑자기 끼어든 사진사에게 순간 짜증을 내는 모습이거나, 어쩌다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게 하필 프레임에 잡혔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진사의 이름은 알프레트 아이젠슈태트(Alfred Eisenstaedt, 1898-1995)로 실제 유대인은 맞았고, 다행히 1935년 일가족과 미국으로 망명하여 홀로코스트는 피했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https://ko.wikipedia.org/wiki/V-J_Day_in_Times_Square|수병의 키스]](V-J Day kiss image) 사진을 찍은 사람이기도 하다.]|| 유대인 탄압은 나치 집권 후 비단 문화계 전반뿐만 아니라 각 사회 전체로 파급되어,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되는 1935년도 되기 전인 1933년 집권 직후부터 시행되었다. 정책으로 시행되지 않아도 돌격대 깡패들이 족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유대인 공무원이나 교수, 판사의 사무실에 몰려가서 '유대인 꺼져라' 소리지르며 난동을 부리고 개판을 쳐대면서 유대인 출신들은 독일 사회에서 점차 강제로 밀려나게 되었고, 탈(脫)유대화의 조치로 유대인 자본의 회사들에 대해 강제매각 명령이 떨어졌다. 문화계 또한 그 동안 총통 각하를 비롯한 나치 예술인들이 바이마르 시대 예술에 혐오감을 진작부터 드러내고 있었기에 총통 각하의 열렬할 추종자인 괴벨스가 문화계에 손을 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새로운 '숙적'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행동력도 없고 나치당 내에서 괴벨스에게 영향력도 밀리는 데다가 반기독교적 무신론자라서, 정권을 잡고 난 후 지지율이 떨어질 걸 우려한 히틀러가 멀리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공상주의적 이론가였던 로젠베르크가 나설수록 교회 세력의 반발과 함께 인기가 깎였기 때문에...[* 훨씬 후이긴 하지만 로젠베르크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나치당 바이에른 관구장 겸 바이에른주 문화장관이던 아돌프 바그너가 학교에서 십자가를 전부 치웠다가 기독교계가 엄청나게 반발하여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짤라야 했던 적도 있다.] 괴벨스가 문화 쪽에 손을 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제국문화원(저술, 언론, 방송, 연극, 음악, 영화, 미술 분과로 나뉘었다)이 설립되면서 문화계에서 활동하려면 문화원에 가입해야 되었는데, 물론 '아리아인'만 가능했다. 괴벨스의 전공 분야인 저술이나 언론, 방송은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도 '전직 화가' 히틀러의 취향은 맞추기 어려워서 골수 나치당원인 화가들도 화풍이 유대적으로 물들었다고 판정되면 가입이 거부되었다. [[파일:attachment/파울 요제프 괴벨스/photo2.jpg]] 한 번은 선전장관님의 저택이 공사를 마무리히고 개관식 겸 집들이 겸사겸사로 나치당 고위 인물들과 히틀러까지 초청해서 문을 열었는데, 히틀러가 집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욕을 퍼붓고 황급히 차를 타고 돌아가버렸다. 다른 초대 인물들도 벙쪄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돌아가면서 선전장관 저택에서의 파티는 나가리가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히틀러가 화난 이유는 선전장관님의 저택이 공금을 빼돌려 사치스럽게 지었기 때문은 아니었고 제멋대로 국립미술관의 그림을 집안에 번듯히 걸어놓은 월권행위 때문도 아니었으며, 단지 선전장관 저택 건물 '''입구에 걸린 '에밀 놀데' 작품의 수채화가 천박해서'''였다니 괴벨스의 고충을 알 만하다. 괴벨스는 처음에 대학 시절 예술 쪽 강의를 몇 개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안목이 쓸 만하다고 여겼는데 히틀러의 기준으로 보나 '진짜' 미술 전문가의 기준으로 보나 영 수준 미달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 화풍에 물든 작가들이 하루아침에 화풍이 바뀌었을 리가없지만 나치당 내 높으신 분들의 취향이 총통 각하의 취향으로 모두 바뀌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후에 다른 나치 관료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그 당시 현대 미술은 괜찮게 봤지만 히틀러에게 호되게 혼날까봐 전향했다고도 진술했고... 괴링은 2차대전 때 무엄하게도 총통 각하와 미술품 약탈 경쟁까지 할 정도로 그림 덕후질을 하며 아리아 화풍에 물든 열렬한 문화인 인증을 했다. 괴벨스는 총통 각하의 고귀한 취향에 충성하기 위해서 '[[퇴폐미술]] 전시회'를 열었는데, 현대미술 작품 사이사이에 정신병원에서 병자들이 그린 그림을 그럴 듯하게 집어넣어서 누가 그렸는지 알아맞추기로 웃음거리를 만드려고 노력했다. 이 웃음거리로 전락한 그림들의 정체는 앞서 총통 각하를 격분시킨 에밀 놀데를 포함하여 페히슈타인[* 에밀 놀데와 페히슈타인은 나치 지지자에 아들이 돌격대원이었는데도 총통 각하에게 그딴 건 전혀 중요치 않았다.], 프란츠 마르크, 모더-존베커, 바를라흐, [[피카소]], 칸딘스키, 키르히너, 코코슈카, 파이닝어, 로틀루프, 샤갈, 헤켈, 막스 베크만 등의 저작이 포함된 이른바 '''문화 볼셰비즘''' 작품들이었다. 전시회가 끝난 후 괴벨스는 이 중 1,000여 점은 외국에 팔아먹었고 나머지 5천여 점은 전쟁을 앞두고 베를린 소방서 앞에서 홀랑 태워먹는 [[반달리즘]]을 지휘했다. 음악 분야에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독일 내에 눌러앉히느라 괴벨스가 고생 깨나 했다. 이 분야에서도 전문가급 되시는 총통 각하의 음악 취향은 매우 까다로워서 '[[리하르트 바그너|바그너]]는 좋은데 [[요하네스 브람스|브람스]]는 별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은 괜찮은데 슈트라우스는 별로...' 이런 식이라 총통 각하께서 군말 안하고 넘어가는 지휘자는 푸르트벵글러가 거의 유일했다.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파울 힌데미트 등을 무리하게 잡으려는 괴벨스와 이를 디스하는 새로운 앙숙 로젠베르크와 상호 디스와 열폭질이 고귀한 아리아인 문화와 대비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괴벨스는 자신의 '''진짜''' 주 전공인 저술 분야에선 의외로 곤란한 처지에 처했는데, 그의 은사인 군돌프 교수와 발트베르크 교수가 유대인이라 괴벨스가 나서면 나설수록 셀프 [[패드립]]이 되는데다가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에서 로젠베르크를 비롯한 정적들도 괴벨스에게 한 방 먹이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한 대학에서 유대인 혹은 유대적 작가와 유대주의에 물든 책들을 불태울 때 괴벨스의 연설을 요청했는데, 그는 일부러 확답을 질질 끌다가 행사 예정일 당일에야 연락을 취하고 연설을 수락한다. 나치에 의해 유대적으로 물든 작가로 선언된 문호 노벨상 수상자 [[토마스 만]]의 아들은 당시 행사에서 직접 괴벨스의 연설을 들었는데 의외로 차분하며 오히려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다른 분야면 몰라도 타들어가는 책 앞에서 자신의 생의 일부인 암울했던 젊은 시절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었다. ||Als das Regime befahl,[br]Bücher mit schädlichem Wissen Öffentlich zu verbrennen,[br]und allenthalben Ochsen gezwungen wurden,[br]Karren mit Büchern Zu den Scheiterhaufen zu ziehen,[br]entdeckte Ein verjagter Dichter,[br]einer der besten,[br]die Liste der Verbrannten studierend, entsetzt,[br]daß seine Bücher vergessen waren.[br]Er eilte zum Schreibtisch Zornbeflügelt,[br]und schrieb einen Brief an die Machthaber.[br][br]'''Verbrennt mich!'''[br]schrieb er mit fliegender Feder,[br]'''verbrennt mich![br]Tut mir das nicht an![br]Laßt mich nicht übrig![br]Habe ich nicht Immer die Wahrheit berichtet in meinen Büchern?[br]Und jetzt Werd ich von euch wie ein Lügner behandelt![br]Ich befehle euch,[br]Verbrennt mich!'''||정권은 명령했다.[br]해로운 지식을 담고 있는 책들을 불사르라고,[br]사방에서 황소들이 책으로 뒤덮인 짐수레를 끌고 온다.[br]화톳불을 태우기 위해.[br]추방된 작가 한 사람이,[br]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br]불탄 책의 목록을 훑어보다가 충격을 받는다.[br]자기 책이 빠진 것을 알고 말이다.[br]작가는 분노의 날개로 황급히 책상으로 날아가.[br]권좌에 있는 이에게 편지를 썼다.[br][br]'''나를 태워라!'''[br]작가는 휘날리는 펜으로 썼다.[br]'''나를 태워라![br]내 책은 언제나 진실을 전하지 않았던가![br]그렇게 해 다오![br]나의 책을 남겨 놓지 말아다오![br]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br]헌데 이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br]나는 너희들에게 명령한다.[br]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2> <분서(Die Buecherverbrennung)>, ~~베르톨트 브레히트, 1937년 8월~~[* 브레히트 자신의 작품은 아니다. 1933년 5월 베를린에서의 대대적인 분서 이후 독일의 작가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는 분서 목록에 자신의 책이 빠져있는 것을 확인하고 빈 노동자 신문에 '나를 태우라(Verbrennt Mich)'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다. 브레히트는 이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 한편 브레히트의 시 내용대로 브레히트의 작품은 전면 금지당하지 않았는데, 나치 이념이나 인종드립에 적절해서는 절대 아니었고 브레히트의 작품 배경이 대부분 독일이 아닌 데다가 대표작 <서 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 같은 작품은 근대 영국이 배경으로[* 18세기 말 영국이 배경으로 100여 년 전 잊혀진 작품을 발견해서 브레히트가 개작한 것이다.] '''부르주아 금권정치 사회현실의 폐해를 잘 나타낸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 분야에는 어느 분야보다 유대인 작가나 배우 비중이 높은 데다가 히틀러는 '연극이란 건 남의 흉내내기 급급한 유대인의 습성과 닮았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분야보다 타격이 컸다. 괴벨스가 악명을 드높이며 심혈을 기울인 언론 분야는 그가 직접 솜씨를 부렸는데, 괴벨스가 글쟁이 출신이라 잘 알듯이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는 작가'들이라도 그들의 글을 직접 건드리면 앞뒤 물불 안 가리고 반발할 것을 애초에 예상하고 검열 대신 세련된 '''보도지침'''을 내렸다. 이 당시 보도지침은 특정 사안을 아예 다루는 것을 금지하기보다는 특정 '''단어'''에 대해서 사용 '''자제'''를 권고하는 수준에서 시작되어 언론의 자유 드립을 치는 기자들의 반발이 생각보다 매우 적었으며, 경제적 이유를 생각해야 하는 언론사 사주들 입장에서도 단비 같은 조치였다. 이후 점점 다락방에 물이 차오르듯이 지침들이 세세해지고 특정 사항에 [[엠바고]]([[장검의 밤|돌격대 숙청]] 당시 도주자들의 성명을 보도하는 것을 체포에 방해된다는 이유 등으로 통제)나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 또는 군축이나 재무장 같은 사항에선 기자들도 국민 감정상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운영하던 곳이나 괴벨스가 실업자 시절 취직을 '거부'당했던 유대 자본 출판사는 폐간을 면치 못했지만 [[체코]]나 [[덴마크]], 프랑스 등지에서 지하 조직을 펴서 발행한 신문들을 '''꾸준히''' 반입하고 있었고 당시 지식인이라면 불어나 영어 신문을 입수하거나 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정부 쪽 이야기로 통제만 했다간 오히려 비웃음을 동반한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현재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적어도 [[2차대전]] 전 나치시대 언론의 자유는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수용소에 끌려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순수 아리아인 출신 기자가 보도지침을 어기면 처음에는 경고를 당하고, 그 후에는 감시를 하다가 더 말을 안 들으면 밥줄을 끊었다. 물론 적극적으로 나치 정권에 저항했으면 해외로 망명하거나 수용소에 끌려가겠지만. 괴벨스의 솜씨 덕에 현재에도 독일에서 저명한 보수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FAZ)은 2차대전이 말기에 접어든 1943년에야 폐간되었다. 이는 괴벨스의 술책으로, 외국에서 볼 때 외견상 [[제3제국]]의 언론의 자유는 보장이 된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괴벨스는 1920년대에 [[라디오]]를 처음 접한 뒤 이것을 '''본질적으로 권위적인 수단'''으로 생각했고, 라디오는 모든 이들이 악명 높게 기억하는 [[제3제국]]의 효율적인 통제 수단의 시작이었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라디오 상업방송이 시작된 것은 1923년으로 괴벨스가 방송 분야의 정치적 중요성에 눈 뜬 계기는 1930년 총선이었는데, 당시 집권 내각 브뤼닝 정부가 대놓고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당과 정부에 유리한 시간대를 배정하는 횡포[* 브뤼닝 내각 인사들은 정상적인 인물이다. 시대착오적 긴축 정책을 시행해서 현대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세지만 1933년 나치 정권 후 망명해서 하버드 교수를 지낼 정도.]를 저질러 괴벨스의 분통을 터지게 했고 1932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 때는 이미 괴벨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수단으로 여길 정도로 방송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래서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숙청하기 전부터 괴벨스는 방송 분야에 대해 침을 삼키고 있었다. 정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의 방송 연설이 이 즈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괴벨스는 첫 방송 당시 대중이 없는 낯선 장소에서의 경험 미숙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평소 연설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버버(...)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당시 라디오 방송은 TV가 나오기 전 일상 생활에 일대 혁신적인 수단으로, 일방적으로 방송한 내용을 청자들은 듣기만 하고 반박할 수 없었기에 '''본질적으로 권위적일'''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 방송의 시작부터가 국영방송이자 선전수단으로 도입된 [[조선]]과는 다르게 독일은 1920년대부터 지역을 기반으로 여러 방송사가 난립하고 있었고 꼭 괴벨스의 희망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정된 주파수 문제와 여러 다른 기술적 문제, 상업방송에 대한 규제 미비 등으로 정부에서 개입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괴벨스는 이번에는 신문이나 출판사를 대할 때와 달리 관대하지 않았는데, 정부 개입에 반대하는 방송사들은 강압적으로 통폐합되었으며 높으신 분들을 믿고 뻗대는 '이놈의 방송 남작님들(진짜 남작이란 게 아니고 계급선동적 언어를 사용하는 괴벨스의 혐오유발적인 표현이다)' 몇몇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